첫 면접 날이었다. 여러 질문들이 오가고 마지막에 "10년 뒤엔 본인이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10년 뒤엔 제가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하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그 전에 많이 배우고 쌓아서, 발전하는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면접 바로 전까지 도서관에서 디자인 관련 책들을 읽다가 본, 어느 디자이너가 말했던 구절이었는데 이렇게 면접 때 바로 입에서 나오다니. 그땐 그저, 앗싸를 외치며 내 대답에 만족을 느끼는 상사들의 미소를 보았다. 그렇게 편집디자인의 길이 시작되었다.
원래 어릴 때, 나의 꿈은 만화가였다. 한국의 만화계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혼자만의 야망으로, 앉으면 그림을 그리고 일어서면 스토리만 생각했다. 집안의 반대로 예체능 쪽으로 가지 못해서, 입시 때 엉뚱한 과에 들어갔다가 스무 살의 나는 많은 방황을 했다. 그동안 하나의 꿈으로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이젠 그 꿈이 나와 상관없는 길이 되어버리다니···
‘앞으로 뭐하며 살지··· 그래, 아무 길도 생각이 안 나면 생각날 때까지 어디 한 번 고생해봐라···’라는 생각으로, 학교를 다니며 새벽 우유 배달도 하고 평일, 주말 알바도 해가며 나는 날 혹사시켰다. 그리고 어느 날의 새벽, 다른 회사의 우유 배달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때 난 이렇게 말했다. '저, 서울 가요. 그래서 이제 곧 이 일을 그만둡니다.'
우리 집은 난리가 났다. 사남매 중에 막내인 난, 이 집안에서 가장 말을 안 듣고, 공부도 못 했으며 심지어 그림에 재능도 제일 없었다. 왜 내 위의 형제자매들은 공부도 잘하고 그들에게 필요 없는 그림 재능까지 있어서, 날 이렇게 괴롭게 만들었을까. 사춘기 때 반항도 안 했는데, 갑자기 집안의 문제아가 되어버렸다. 스물한 살, 휴학계를 내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알바를 구하고, 같은 날 노량진역으로 가 미술학원을 끊었다. 이때만 해도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솔직히 그때도,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림에 재능이 없었다. 언제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내 주변에 널리고 깔려서, 내가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두고 봐라. 노력하면 된다는 걸 보여줘야지.
그렇게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살았다. 남들보다 더 노력하면 뭐라도 진행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계속 열심히···!
누군가 말했다. 꿈은 계속 생각하면 된다고.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건, 그 생각을 멈춰서라고. 계속 생각하다 보면 내가 그 길을 향해 인생을 걸어가게 된다고. 그리고 누군가 말했다. 너네는 절대 날 따라올 수 없다. 재능과 노력으로 준비하는 나를, 너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살아보니, 둘 다 맞았다. 만화가가 되겠다며 서울로 올라왔던 나는 재입시를 준비해 삼수생의 나이에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했다. 디자인과에 간 건 만화지망생 선배가 만화가가 되고 싶다면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니 절대 만화과에 진학하지 말라는 말 때문이었다. 아··· 얼마나 멋진 말인가. 진정한 만화가가 되려면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스토리를 짤 때 도움이 된다니. 난 만화가가 꼭 되어야지. 근데, 이 선택이 내 진로를 바꿨다. 컴맹이었던 내가, 편집디자인 수업을 들으며 책 만드는 걸 배우다 보니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건 한 권의 만화책을 만들고 싶다, 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는데, 내가 직접 다양한 방법으로 책을 만들 수가 있었다. 난 그렇게 만화가라는 꿈에 대한 생각을 덜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꿈을 잊게 되었다.
이젠 책을 만들어야지. 그럼, 어느 회사를 가야 하지? 그때 운명처럼 북디자이너들의 인터뷰 책을 보게 되었고, 몇 명에게 이 방법에 대해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한 분에게 답변이 왔다. “북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면, 처음부터 북디자이너를 시작하지 마라.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북디자이너의 길로 가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구나. 무언가를 하기 위해선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구나. 그래서 그 후 난 편집디자인 에이전시에 입사를 했다.
그런데 왜 내가 조언을 구한 사람 모두들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하는 걸까, 그리고 그 길로 직접 가지 말라는 걸까. 그리고 왜 나는 언제나 선택을 할 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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