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진심
바람이 많이 부네요. 더운 초겨울을 걱정하던 저에게는 반가운 추위입니다. 내일은 첫눈이 온다고 하네요. 눈이 아주 많이 오면 좋겠습니다. 오늘, 레터를 써야 하는데 하얀 백지 앞에서 조금은 망설이다가 이렇게 또 글을 씁니다. 저는 지난주에 대전에 다녀왔고, 내일은 부산에 갑니다. 11월에 지역 북페어가 좀 몰려 있네요. 그래서 정신이 없는 11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어요. 북페어에 갈 때마다 떨리기도 하고, 슬픔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책을 이고 지고 가는 길은 종종 기쁘고 종종 슬프기도 해요. 페어에서 책이 잘 나가면 오잉,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기쁘고 책 설명을 죽어라 해도 책이 안 나가면, 세상에서 제일 팔기 어려운 것이 책이로구나… 하고 급격히 슬퍼집니다. 내가 사랑한 원고들, 내가 사랑하는 느린서재 책들… 대전북페어에서 만난 독자님이 제게 딱 하나만 추천한다면? 이라고 물으셨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한참을 망설였어요. 음… 음… 음… 만 하다가, 제가 추천한 책은 이것도, 저것도, 요것도… 그중에서도… 이것? 이라고 했는데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다 추천하고 싶어요…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해서 두 권 이상 사시면 제가 좀 할인해 드릴게요, 라고요.
대전북페어는, 지금 아주 시끄럽습니다. 셀러들의 비난과 원성이 인스타와 쓰레드에 자자합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북페어에 와주신 시민분들께 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너무나 홍보가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는지가 일단 무척 궁금할 지경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셀러들은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일단 이거 뭐,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게 목적이었나? 북페어 하는 걸 아무도 모르게 하라, 가 제1의 목표였나 싶을 정도로 대전 어디에도 홍보가 안 되었더라고요. 대전컨벤션센터 근처에 아파트가 꽤 있었는데 그곳 게시판에라도 홍보가 좀 되었다면… 게다가 대전에는 몇몇 대학도 있으니까, 이십 대들도 많이 오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저의 예상은 아주 우습게 빗나갔습니다. 음, 일단 가기 전부터 쎄한 느낌이 있긴 했어요. 그래도 중부권 제 1회, 충청권 제 1회니까, 대전 근처에 사는 독자님들도 다 오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상상을 했습니다. 게다가 대전은 좀 뭐랄까, 큰 도시고, 세련된 느낌이 있달까요. 세련되고 고급진 대전이니까… 분명 북페어에 독자들이 가득, 가득… 이라는 저의 예상은 아주 처참히 무너졌지요. 책도 많이 팔고 유성온천에도 가고, 룰루랄라 성심당에도 가서 빵도 잔뜩 사야지, 했지만, 유성온천 다녀오는 위시리스트만 실행했네요. 성심당 빵을 사고 싶었지만 줄이 너무 길어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셀러분들이 사다 주신 덕분에 튀소 맛은 보았어요.
이번 페어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주최측의 배려 부족이었습니다. 일단 책을 택배로 보내고 싶었는데, 그것은 불가하다 했습니다.(사실 택배가 안 되는 북페어는 처음이에요) 무조건 차로 가거나, 숙소에 부탁해서 책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금요일부터 행사 시작인데 목요일에 와서 미리 세팅을 하라고도 했어요. 음? 금요일 아침에 가서 해도 가능한 거리인데 말이에요.(금욜 아침에 가면 안 되냐고 했더니, 참가 안 하시겠다는 건가요? 라고 물어봐서… 대화가 자꾸만 산으로 갔습니다) 게다가 연계된 숙소도 전혀 안내가 없었습니다. 이제 상황이 여기까지 오면… 주최측은 다른 페어를 전혀 검토해보지 않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행사들의 면면을 조금이라도 살펴보았다면, 셀러들을 위한 기본적인 제공 사항을 분명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행사 삼일 동안 점심과 간단한 음료 제공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물 한 병도 주지 않은 주최측에게… 결국 대전의 작가, 연해 작가가 마지막 날,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주최측이 준비한 무대 옆에서 연해 작가는 자신이 직접 준비한 마이크와 엠프를 들고, 대전 시민으로서, 셀러분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어요. 이렇게 귀한 분들 모셔놓고 이따위로 행사를 진행한 주최측은 들어라~! 도대체 왜 콘텐츠 페어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행사를 진행하는 거며, 북페어 홍보는 대체 어디에 어떻게 했는지, 밝히라고~. 대전 시민인 연해 작가는 그렇게 우리를 대신해 한풀이를 해주었습니다. 그 뒤 돌고래 출판사 대표님도 마이크를 이어 받아, 살다 살다 이런 페어는 처음 본다고, 자신의 의견을 아주 강력하게 개진하셨어요. 시일야방성대곡 못지 않은, 대전북페어 한풀이였지요.
북페어를 사전에 아무리 열심히 홍보해도 독자들이 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느린서재 부스에 오지 않으면 그것도 소용 없는 거겠죠. 현장에서 책을 많이 팔 수도, 팔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나를 초대한 이가 나에게 성의를 다해준다면, 그걸로 아마 마음은 가득 채우고 돌아갈 수도 있었을 거예요. 대전에 온 셀러들이 기분이 나빴던 건, 그 어떤 환영 인사도, 잘 가라는 인사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늘, 고압적인 자세, 내가 판 깔아줬으니 너는 와서 책 팔아, 라는 그 강압적인 자세. 우리는 단순한 장사치가 아닙니다. 책, 팔아서 뭐 얼마나 대단히 남는다고, 대전까지 와서 경비 써가며 3일 동안 내 시간을 쓰겠어요. 이익을 생각했으면 오지 않았을 거예요. 판매보다 더 중요했던 건, 내 책을 알릴 수 있는 공간과 직접 독자를 만나서 대화하는 시간, 셀러들끼리의 네트워크, 지역의 문화 향유, 그거였는데 말이죠.
일요일, 4시, 북페어가 끝난 시간, 주최측의 그 누구도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어요. 내년에 또 보자던가, 단체 사진을 찍는다던가 하는 등의 인사도 없이… 짐을 싸면서도 그냥 이렇게 알아서 철수하고 가면 되는 건가? 하고 서로에게 물어보았죠. 마이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건데. 3일 동안 고생했다는 말은 못 들어도, 안녕이라는 말은 해주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대전은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무엇을 위한 북페어였을까요. 예산이 남아서 급하게 써야만 했을까요. 의미도, 독자도, 홍보도 없었던 대전… 안녕.
대전북페어에서 느린서재 부스에 와주신 독자님, 혹시라도 이 레터를 읽고 계시다면, 온 마음을 다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저는 가지고 갔던 <문학처방전>과 <나를 키운 여자들> <잊혀지지 않을 권리>를 모두 팔고 돌아왔어요. 3일 동안 책을 아예 못 팔았던 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라오는 길에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책을 팔고도 이리 기분이 나쁠 수 있을까요. 인제에서는 책을 못 팔고도 기분 좋게 올라왔는데 말이죠. 그러니 결론은 하나입니다. 타인이 나를 도구로 이용할 때, 그들의 수단을 위해서 형식적으로 나를 이용할 때, 우리는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진심이란 무엇인가, 하고 제게 물어봤어요. 어느 순간이든, 무언가를 수단과 도구로 이용하지 않고, 진심을 다해서 책을 만들자고, 앞으로 저에게 남은 시간들을 허투루 보내지 말자고 다시 또 생각해 봅니다.
부산에 가기 몇 시간 전, 수요일 오전, 제가 있는 곳은 아직 눈이 많이 내립니다. 가기 전에 운동화를 빨아서 깨끗하게 해서 신고 가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더러워진 운동화를 어쩔 수 없이 신고 가야 할 것 같네요. 월 화 이틀 동안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널 뛰듯이 마무리 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해서 노트북을 들고 가야할 것 같네요. 부산은 아마도 따뜻하겠죠? 오늘은 부산의 서점들을 돌면서, 인사를 하고 국제시장에 가서 호떡도 사먹을까 합니다. 2년 만에 부산에 가는 것 같네요. 다음에는 아이들도 데리고 가야지요. 아이들에게 뽀뽀를 엄청나게 해주고 어제 저녁엔 치킨을 사주고 큰애에게 동생을 부탁하고, 보고 싶을 거라고, 많이 속삭였어요. 보들보들한 둘째의 뺨이 그리워질 것 같은 오늘입니다.
부산에서 느리게 읽는 시간을 선물하고 오겠습니다. 치열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책을 만들고 책을 팔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