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하고 소중한 존재 앞에서
11월이지만 꽤 포근한 날들입니다. 이번 겨울은 어떠려나요. 두렵고 절망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 혼자만의 근심 걱정일까 싶어 또 허무하기도 하고요. 11월이라지만 예년과 같지 않은 날씨에 잔소리가 또 늘어갑니다. 큰딸은 이번 겨울엔 보일러 틀지 않고 지내기를 해보자고 하네요. 내복을 껴입고 자면 된다고 큰소리를 치는데, 여름엔 에어컨 없이, 겨울엔 보일러 없이… 우리집만 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또 어딘가에서 저희 집과 비슷한 실험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10월과 11월 초의 행사까지 마무리하고, 천천히 다음 원고를 작업하고 있어요. 찬찬히 진행을 하면서 새로 올 다음 책의 내지 시안도 기다리면서, 찬찬히 책상도 정리하고 2025년 출간 일정도 손을 좀 보았습니다. 그동안 급한 일, 급한 일에 둘러싸여서 책상이 완전히 너저분했어요. 읽고 싶은 책들과 읽어야 하는 책, 참고로 봐야 하는 책들을 쌓아놓기만 하고 읽어야 하는데, 라는 마음으로 치우지 않고 있었네요. 욕심은 제 시간을 따라가지 못하고, 욕심 그대로 책상을 차지하고 있어요. 언제 읽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서가로 꽂아두려고 해요. 정리를 하다 보니, 이 책 저 책 조금씩 읽다만 책들이 많네요. 어제는 <어디로 가세요 펀자이씨?>를 읽다가 두었어요. 더 읽고 싶었는데, 큰 애랑 자전거를 타러 밖으로 나가야 했거든요. 아무래도 여러가지로 재정비가 필요한 11월이에요. 서류들도 정리해서 버리고 책상도 조금은 깨끗하게 만들고 12월을 맞이해야 할 거 같아요. 그 사이에 다른 변수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어제는 검토해야 하는 책을 읽어 나가면서 어떤 식으로 재가공하여 새롭게 단장을 할까 고민을 해봤어요. 이런 시간이 얼마 만이지 싶어서 새삼스럽더라고요. 뭐가 그리 바빴는지 늘 숨이 턱까지 차 있었던 거 같아요. 부디, 25년에도 이렇게 여유 있는 일정으로 지낼 수 있음 좋겠어요. 물론 제가 하기 나름이겠지만요. 아, 12월에도 하나의 북토크가 예정되어 있네요. 12월 6일에는 <잊혀지지 않을 권리> 공혜정 저자의 북토크 및 작은 송년회가 준비되어 있어요. 그 작은 송년회를 위해서 또 무얼 준비하면 좋을까, 궁리 중이에요. 24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행사가 될 거 같거든요. 바빴던 24년,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니고, 강원도와 제주까지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내년에는 또 얼마나 돌아다닐까요? 적당히, 짧고 굵고 알차게, 돌아다녀보자, 라고 다짐해 봅니다.
내년엔 책을 좀 여유 있게 만들면서 아이들하고도 더 많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올해는 정말이지, ‘잠깐만~’ 이 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큰애는 저보고 핸드폰 좀비라고 놀리고요. 엄마는 맨날 핸드폰만 봐! 이게 다 책 홍보하는 거야! 이렇게 해야 내일 또 주문이 들어온다니까? 정말? 그럼 봐줄게. 이런 대화를 매일 큰 애와 나눕니다. 그렇지만 아이들과 있는 시간에는 핸드폰을 내려놓기로 했어요. 조금씩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엄마의 모습을…! 일단 산책을 나갈 때는 핸드폰 금지입니다. 저는 요즘 의도적으로 <인스타>에 자주 들어가지 않고 있어요. 인스타에서 오는 알람도 꺼버렸습니다. 제가 들어가기 전까지는 누가 좋아요를 눌렀는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대략 한 시간 정도? 새로운 피드를 올리고 반응을 잠깐 살피는 정도로만 인스타를 활용 중이에요. 처음에는 인스타에 안 들어가니 너무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는데! 요 몇 달, 그야말로 고요한 세상을 보내는 중입니다. 누가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갔는지 모르는 것도, 제 시간에만 집중하는 일도, 꽤 좋네요. 언젠가 팟캐스트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1990년대보다 2024년이 더 행복할까? 라는 질문에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지금이 더 행복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 나는, 미국에서도, 남극에서도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더 자세히 알 수 있지, 라고요.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어서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지만 하나 확실한 건, 우린 그때보다 더 피곤해진 거 같아요. 그리고 더 자주 남과 나를 비교하고요. 누가 누가 무엇을 했고, 나는 무엇을 갖지 못했고, 내가 점점 초라해지는 상황, 몰랐으면 더 좋았을 정보들까지 알아야 하니, 이거 참, 고단하고 머릿속은 정리가 안 되네요. 그렇다고 책을 만들고 책을 알리는 제가 SNS를 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참으로 진퇴양난입니다.
어제 밤에는 자고 있는 둘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 아이는 너무 말랑하고 너무 작고 너무 하얗습니다. 어쩌다가 이 세상에 와서, 우리 집에 와서, 나의 딸로 태어나서, 과연 종종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는 걸까, 궁금하더라고요. 최근에 아동학대 사건들을 다룬 책을 만들었고, 그 속의 내용이나 사건들이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해서 자주 자주 저희 집 아이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왜 아이들을 때려서 죽게 만들었을까. 왜 그토록 오랜 시간 아이를 고문했을까. 키우지 못하겠으면 다른 곳에라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아이들은, 무슨 연유로 짧은 생을 고통 속에서 살다가 가야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슬픔이 명치까지 차오릅니다. 작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그 아이들을 어떻게 뼈가 부러질 정도로, 실명이 될 정도로, 때릴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란 뭘까요. 사람이 제일 무섭고 제일 끔찍합니다. 인간애라는 걸, 이 책을 만들며 다 상실했다가, 그러나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재판정마다 찾아가 방청 기록을 하고 아이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저자분을 생각하면 다시 인간애가 솟아납니다. 인간이란 뭘까 싶어요. 한없이 나빠지는 인간이 있는 반면,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선한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도 있죠. 이런 얼굴도, 저런 얼굴도 그저 다 사람의 것이려니 하고 생각을 정리합니다. 그저 제가 더 나쁜 인간이 되지 않기만을, 그걸 매일 의식하며 하루를 보내려고 합니다. 더 좋아지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며 제 마음을 들여다 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자, 라는 마음의 소리를 들어요. 그 책은 그런 의미에서 제가 만들 수 있었던 책입니다. 그런데 읽어보시라, 쉽게 권하지는 못하겠어요. 읽다 보면 화가 나고 차마 끝까지 읽을 기운이 나지 않는 내용이거든요. 이번 책은 어떻게 팔아야 하나, 를 고민하지 않았어요. 필요한 사람에게 도착하기를 그저 바랄 뿐…입니다.
아이가 태어난 뒤 생각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엄마가 된 저와, 그런 저를 의지 삼아 커가는 아이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도 이제부터 다 알아야만 하는 엄마라는 자리가 무섭고 위태로운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대학에 갈 때처럼 오랜 시간 공부해서 자격 시험을 치른 것도 아닌데, 갑자기 열 달 뒤에 마주한 3.2kg의 아이를 재우고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도망가고 싶을 만큼 커다란 무게로 다가왔지요. 물론 저 혼자 아이를 키우는 건 아니지만, 아주 많은 시간, 아이와 살을 포개고 있는 사람은 엄마니까요. 그렇게 오롯이 마주한 엄마가 자신을 때리고 먹을 것도 주지 않고, 나가 죽으라고 폭언을 한다면, 그 아이는 무슨 마음을 품게 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살 만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듯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다고, 사랑이 아닌 저주와 폭력을 견뎌야 했을까요.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지만, 모성애는 본성은 아니지만, 그저 사람이 사람이기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디 작은 아이 앞에서 그저 상식적으로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기를, 그것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열혈사제 2>에서 김남길 배우가 그러더라고요. 어딘가에는 하느님이 있다는 걸 (나쁜 놈들에게) 알려줘야 하지 않겠냐고요. 그래서 그는 싸웁니다. 저 역시 만약 신이 있다면 아이들을 좀 더 살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나쁜 어른들 말고요.
오늘은 아이랑 조금 더 오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이 세상에 와서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더 많은지 물어보고 싶어요. 그리고 가능한 좋은 어른, 좋은 사람, 좋은 엄마가 되어보겠다고 약속도 해보려고 합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그런 약속을 어서 해놓지 않으면 순식간에 우린 이별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