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번호를 삭제했습니다
“무리하지 마.”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친정엄마에게요. 제가 생각해도 10월은 참 행사가 많았습니다. 몸은 사십 대인데 몸 생각은 하지 않고 이리 저리 사방으로 뛰어다니니까요. 그래서 어디라도 다녀오면 그 다음 날에는 하루종일 누워 있어요. 아 정말 이십 대에는 어떻게 돌아다닌 건가, 싶더라고요. 다시 이십 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만약 돌아간다면 저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어요. 제발 술 좀 그만 마시고, 책 좀 더 읽고, 여행도 더 다니고, 편견과 아집은 버리고, 결혼은 좀 더 늦게 해도 되고, 그리고 아이를 낳더라도, 회사는 어떻게든 다니면서 좀 더 버티고… 뭐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상상만 해봅니다.
어제는 길음역 햇살속으로 책방에서 북토크가 있었어요. 네, 그래서 오늘 오전에는 하루종일 누워 있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북토크 가기 전에 레터를 쓰고 간다! 가 저의 플랜이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과거의 나가 일을 너무 많이 벌여놓고 갔으니까요. 그 일들을 처리하고 개별적으로 입고 문의가 온 책방들에 책을 보내고, 이번 신간의 공동구매 페이지도 만들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되서 부랴부랴 나섰는데, 서울 가는 길에 들리고자 했던 책방들에는 들리지도 못하고 바로 길음역으로 가야했어요. 차가 너무 막혔거든요… 오랜만에 간 <햇살속으로>, 길음역은 무척이나 붐비고 사람들도 정말 많았어요. 서울에 갈 때마다 생각해요. 와… 이렇게 사람이 많다고…? 참 새삼스럽지만, 이렇게 좁은 땅에 이렇게 많은 건물이, 이렇게 많은 차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때로는 숨이 막혀요. 사람들을 붙잡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혹시 기후위기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같이 북토크 가실래요?” 이랬다가는 미친년이 될 수도 있어서, 꾹 참고 혼자 책방으로 걸어갔습니다. 책방 대표님도 그러시더라고요.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그 일정들을 소화하고 있는 거냐고 물으셨어요. 근데 생각해보니 제가 한 180퍼센트 정도 오버해서 돌아다녀야 책이 10퍼센트, 아니 5퍼센트 정도 나가는 것 같더라고요. 늘 오버페이스로 돌아다녀도 돌아오는 성과는 아주 미세한… 미세 플라스틱 같아요. 그래도 그 미세 플라스틱 같은 성과를 위해서 저는 사방으로… 혹은 인터넷상에서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어요.
무리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는 친정엄마에게도 갑자기 욱해서 그렇게 말했어요. 아니, 이 정도 해야, 겨우 한두 권 정도 나간다고… 그런데 어떻게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엄마는 제게 책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 팔려고 하는 거야, 라고 호통을 쳤지만 둘 다 아니겠나요… 만들기만 하면 뭐해요, 저 혼자 볼 책도 아닌데. 만들고 팔려고 하는 거지! 라고 저도 받아쳤습니다. 만들기만 하면 뭐 저절로 책이 나가는 줄 알아? 라고 씩씩거렸네요. 만들고 팔고 또 만들고… 그게 출판사의 주요 업무니까요. 그러나 파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회사에 다닐 때는 만들기만 해도 월급이 나왔어요. 그래서 잘 몰랐던 거 같아요. 책이 팔린다는, 팔릴 만하다는 그 감각을요…! 하지만 저는 지금도 모릅니다.
지난번에, 서울에서 만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만든 어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안타깝게도 그 책의 저자가 지금 국내에 없어 북토크가 불가하다고 했더니 그이가 그러더라고요. “그 책은 망했네?” 그이는 농담처럼 말했고, 그 말이 얼추 맞는 부분도 있지만, 그 책을 만든 사람 앞에서 어찌 저리 쉽게 망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순간 했어요. 그때 그 자리에서 같이 웃었던 제가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았어요. 그때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는데, 날이 갈수록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말을 곱씹고 있어요. 아, 너 눈에는 내가 망한 걸로 보이는구나. 네, 저는 뒤끝 있는 사람입니다. 한마디 한마디를 다시 생각하고, 무슨 의도가 있을까, 매일 고민합니다. 그리 쉽게 망했다는 말을, 매일 사력을 다해서 책 만들고 있는 사람 앞에서 하지 말았어야지. 뒤에서 그 말을 하는 건 당신 자유지만. 당신에게는 그리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거나 말일지 몰라도, 당사자에게는 너무 상처가 되는 말이라고요. 물론 그이는 지금 자신이 그 말을 했다는 것도 모를 거예요. 잊었겠죠. 늘 즐거운 사람이니까요. 제작비 6-700만 원을 쏟아 부어, 내 시간을 갈아 넣어 만든 책에, 함부로 망했다는 말을 하는 이를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거 같아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무 상관없지만, 면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제가 앞으로 만날 이유가 있을까요. 그래서 그 사람 번호를 연락처에서 삭제했습니다. 저는 이제 저를 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줄 시간이 없어요. 또 사력을 다해 만들 원고가 남아 있으니까요. 느린서재 책을 사랑하는 사람만 만나기에도 지구에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 시간에 구독자 여러분에게 레터를 쓰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니까요.
판매되지 않은 책은 망한 책, 이라고 누군가는 생각하겠죠. 그리고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닐 거예요. 그렇게 따지면 망했다, 망하지 않았다는 오로지 부수로만 결정되는 거겠죠. 수치로만 본다면 그게 틀린 말도 아니라는 걸 압니다. 저 역시 T가 내재되어 있기에, 매일 매일 제작비와 손익분기 사이를 저울질하고 분석을 하거든요. 그러나 제 창고에 책이 아무리 쌓여 있어도, 아무리 책이 안 나가도 저는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신승리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아직 누군가에게 읽혀지지 않았을 뿐, 이 글자와 이 종이에는 제가 담고 싶었던, 저자가 전하고 싶었던 의미와 필요가 분명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망한 책이 있을지 몰라도, 느린서재 책들은 하나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1인 출판사의 슬픔과 기쁨> 북토크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 중에 발코니의 희석 대표님이 하신 이야기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네, 맞아요. 저는 아직도 그 문장을 내내 생각하고 있습니다. 책의 경쟁상대는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쇼츠도 아니라는 말, 책의 경쟁 상대는 이토록 살기 힘든 대한민국이라는 말이요. 사람들은 살기가 너무 바빠, 너무 빡빡해서 책 읽을 시간을 낼 여유도 없다고 하셨어요. 아마 우리가 사는 곳이 조금 더 살기 괜찮아진다면, 분명 사람들은 책을 더 많이 읽을 거라고요. 맞아요. 좀 더 생각을 해야 하는 책을, 퇴근하고 돌아와 누가 읽고 싶겠나, 싶어요. 아무 생각 안 해도 좋을 쇼츠가 대한민국에서 더 많이 소비되는 건 이유가 있겠죠.(저도 쇼츠 자주 보니까요) 순간적인 자극과 멍때림, 이것이 소비되는 이유가… 너무나 뻔해 보입니다.
황서미 작가님이 제게 그러셨거든요. 돈이 없어도 돈 없다고 하지 말라고, 책이 안 팔려도 안 팔린다고 말하지 말라고. 돈이 있는 척, 책이 팔리는 척, 그래야 느린서재가 잘된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거라고 하셨어요. 척 하다 보면 책이 또 나갈 거고, 척 하다 보면 돈도 쌓인다고 그러셨어요. 맞아요. 그 말이 맞아요. 그런데… 죄송해요. 작가님 하고 약속했는데 저는 오늘 또 이런 이야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저를 싹 다 뜯어 고쳐서 , 다시 조합하고 싶은 금요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