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그리고 29년이 지나…
너무 뻔한 말이지만, 여름이 지나갔어요. 사실, 전 가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이대로 뜨거워진 지구에서 죽으면 어쩌나, 올해는 가을도 겨울도 없는 거 아닐까…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저의 상상을 와장창 깨고 가을이 와주었어요. 믿을 수 없이 시원한 아침, 선선한 바람, 높고 높은 가을 하늘, 하나하나 물들어 가는 나뭇잎… 세상에 여름이 가긴 하네요. 눈물이 날 만큼 고마운 가을입니다. 하루하루 믿을 수 없이 시원한 가을을 마음껏 즐겨야겠어요.
지난주 주말에 저는 인제 <박인환 문학 축제>에 다녀왔어요.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에 2년 정도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기억 때문인지 사실 인제는 제게 익숙하고 친숙한 동네에요. 그곳에서의 힘들고 슬프고 지우고 싶은 기억도 많지만, 이제는 그것도 다 지난 일이 되어서, 왠지 인제는 저에게 아련한 곳이 되었어요. 그래서 <박인환 문학 축제>를 한다고, 셀러를 모집한다고 했을 때, 냉큼 신청했어요. 될지 안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기회에 다시 한 번 옛 동네에 가본다면 참 좋겠다… 라는 사심을 담아서 말이죠. 그곳에 살았던 해는 95년, 96년이었는데 그곳은 외롭고 또 그리운 이상한 곳이랍니다. 제가 살았던 원통에는 원통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고, 바로 그 터미널 앞에 작은 서점이 하나 있었어요. 이름하야 <한아름 서점>. 이사간 동네에서 제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동네 서점을 찾는 일이고, 그곳 사장님 하고 친해지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우선 과제였어요. 그래야 그 동네에서 마음 편히 신간을 주문해서 볼 수 있으니까요. 비디오 대여점과 동네 책방 사장님과 친해지는 일이 중학생인 저에게는 사실 공부보다 중요한 일이었으니까요. 온라인 서점이 없던 때라, 동네 책방은 최신 문화 콘텐츠가 유입되는 아주 중요한 경로였어요.
토요일, 학교를 마치고 12시쯤? 집에 가는 길에 있는 그 한아름 서점에 늘 들리는 게 습관이었어요. 꼭 책을 사지 않아도 그냥 어슬렁거리는 거죠. 사실 그 한아름 서점에서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그 원을 뺀 만큼 너를 사랑해> 그 시집을 만났어요. 2500원짜리 그 시집을 얼마나 자주 들여다 봤는지 몰라요. 중학생 소녀에게 사랑이란, 그런 건가… 하는 환상을 심어준 시집이었어요. 사랑을 해본 적은 없지만, 사랑을 한다면, 이런 느낌이려나. 토요일에는 서점에서 한참 방황을 하고 용돈을 모아서 꼭 사고 싶었던 책을 사거나, 아님 사장님에게 신간 주문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전에 꼭 그 서점에 들리곤 했는데… 아쉽게도 그 서점은 이제 없더라고요. 터미널 바로 앞 그 서점 자리는 떡볶이집으로 바뀌어 있네요. 언제쯤 서점은 문을 닫았을까? 말이 없으시던 그 사장님은, 늘 책을 읽고 있던 그 사장님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실지? 온라인 서점이 생기던 2000년대 초반에 한아름 서점도 문을 닫았으려나? 별별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어디 물을 곳도 없더라고요. 이번 <박인환 문학 축제>의 책방거리를 준비하신 인제의 ‘나무야’ 책방 대표님에게 원통의 ‘한아름 서점’에 대해 혹시 아시냐고 물었는데, 당연히… 모르신대요.
아... 95년이라니. 벌써 29년 전, 그곳에 있었던 서점의 이야기는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요? 타임슬립이 가능하다면, 꼭 한 번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어쩐지 세상과 단절된 섬 같았던 원통에서, 서점을 운영하셨던 그 사장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어요. 사춘기 소녀의 도서 주문 리스트를 언제나 반가워 해주셨던 사장님, 그때 서점은 저에게 또다른 문이었고, 숨통이었어요. 늘 새로운 이야기가 가득했던 곳, 책을 사지 않아도 뭐라 하지 않으셔서 가볍게 방황하다 갈 수 있던 곳. 갈 곳이 없는 외로운 사춘기 소녀에게 늘 열려 있던 곳. 그때 서점마저 없었다면 진짜 제 인생은 더 재미없었을 것 같아요.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때 그곳에 서점이 있어서요.
2024년의 원통에는 서점이 없었지만, 인제에는 <나무야> 책방이 있어요. 인제 시외 버스 터미널 근처, 2층에 자리 잡은 나무야 책방. 곳곳에 책방지기님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어요. 생태 환경 이야기부터, 그림책을 위한 아늑한 별도의 공간까지. 행사 1일차 저녁에 셀러들끼리 모여 작고 다정한 뒤풀이를 했어요. 서울에서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오신 셀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다들 이번 참가가 첫 참가가 아니시더라고요. 작년, 재작년에도 참가를 하셨던 출판사와 책방들이었고,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행복했던 탓에, 올해도 인제까지 달려오셨다고 해요. 역시나 … <박인환 문학 축제>에서 열린 이번 북마켓은 감동의 감동 대행진이었어요. 책 판매에 대해서는 사실 가기 전부터 어느 정도 마음을 좀 내려놓고 갔어요. 반려인은 저에게 강원도 인제에 사람이 얼마나 오겠냐며… 가기 전부터 초 치는 소리를 했죠. (원래 반려인이란 늘 그런 존재니까, 뭐 상처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겠다고 한 건, 예전에 살았던 동네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셀러들에게 제공되는 여러 배려들 때문이었어요. 일단 1박을 할 수 있는 숙소가 제공되고요. 행사 이틀 동안 점심과 저녁 중간 중간 커피까지 다 살뜰히 준비되어 있었어요. 그곳에 머무는 동안 잠자리, 먹을 거리는 주최측 나무야 대표님이 다 알아서 준비를 해주신 덕에 정말로 귀한 손님처럼 대접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게다가 또 이번 북마켓을 얼마나 열심히 홍보를 하셨는지요. 인제와 원통 곳곳에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어요. 이렇게 셀러들을 배려하고 챙기는 북페어라니…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년에도 이곳에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5시에 행사가 끝나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소감을 나누고… 2024년 최고의 북페어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곳까지 와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시던 나무야 책방 대표님은 말을 잇지 못하시고 울컥…! 모두 한마음으로 셀러들은 이렇게 외쳤네요. “천강희, 울지 마!”
올해, 2월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북페어에 참가했습니다. 책 판매가 좋았던 날도 있었고 영 아니었던 날도 있었어요. 그러나 북페어에 책만 팔러 나가는 건 아닙니다. 북페어에서 참신한 책도 만나고 그 책을 만든 작가님도 만나고 더불어 다른 출판사 대표님들을 만나기도 해요. 그렇게 친해지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기도 하고요. 이번 페어에서 만난 대표님을 그 다음 페어에서 또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책 판매와 상관없이 유독 인상적인 북페어가 있었어요. 비건 김밥을 준비해 나누어 주던 <제주북페어>, 독자와의 다정한 소통을 만들어준 <인천아트북페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셀러들을 극진하게 대접을 해준 <박인환문축제 책방거리>… 내년에도 느린서재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이 세 곳의 북페어에는 또 나가고 싶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좋은 책을 만들면, 분명히 책은 팔릴 거예요. 독자들이 분명 그런 책을 귀신처럼 찾아내니까요. 독자들을 믿고 저는 그럼 또 책을 만들러 가겠습니다. 다정하고 감사한 그 얼굴을 만나러 저는 10월에도 열심히 돌아다닐게요. 혹시라도 시흥 보따리 책장, 광명 북페어, 천리포 책바슴, 대전 북페어, 부산아동도서전, 부산 마우스페어에서 느린서재를 찾아오실 예정이라면… 꼭 이야기해주세요. 레터 잘 보고 있다고요…!
편지를 읽어주신 당신을 위해 작은 선물을 들고 갈게요. 가을이네요. 책 읽기 딱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