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담담하게
2주, 잘 지내셨나요? 바람이 참 시원해 졌어요. 저는 이 밤, 창문을 열고 레터를 쓰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어떤 표정으로 이 레터를 읽고 있을까요? 궁금하네요. 여름이 지나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시간은 역시나 정직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간, 시간은 지나고 지나서, 2024년이 4개월만 남았다고 말해주네요. 여름이 지나고 나면, 뭔가 막바지로 막 치닫는 느낌입니다. 가을이 오긴 오고, 비도 오고, 숨이 막힐 것 같던 여름을 이렇게 보내줍니다. 그러나 안심해서는 안 되죠. 원래 가을 볕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요. 함부로 긴 팔을 입었다가 또 후회할지도 모르니까요. 아직 반팔을 좀 남겨두어도 될 것 같아요. 이제 밤에는 선풍기 없이도 살 것 같아요. 그래서 하루하루 감사하고요. 에어컨 없는 여름이라는 실험을 끝낸 아이들에게, 어쩐지 눈물 나게 고마웠습니다. 전기료도 많이 안 나왔지만, 땀띠가 나면서도 엄마와 아빠의 결정에 따라준… 아이스팩으로 여름을 나준 아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이거 다 너희들 덕분이야… 엄마가 흔들릴 때도, 너희가 안 튼다고 해서…! 제가 너무 감격을 했더니, ‘왜 저래’라는 시선으로 첫째가 저를 쳐다 보네요. 첫째는 사춘기가 시작된 것 같고, 저는 어쩜 갱년기가 시작되려고 하나 봅니다. 툭 하면 울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없이 무심해지기도 하네요.
여름 밤, 화이트 와인 한 잔을 꼭 마셨어요. 더운 여름, 저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이스팩을 덕지덕지 몸에 붙이고 노트북 앞에 앉은 제 모습과 와인은 좀 안 어울렸지만, 그렇게 시원한 와인에 얼음을 퐁당 넣을 때의 기분이 좋아서, 매일 밤, 한 잔 마셨어요.(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되는 날도 있었지만요) 여름 밤을 위로해 준 친구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파트 앞 상가에 주류 전문점이 생겼는데 와인은 그곳에서 10,000~15,000원 사이의 것으로 골랐어요. 와인을 잘 모르기도 하고, 그저 화이트 와인이면 되기에, 바디감에 별 표 두 개가 있는 와인이면 충분했습니다. 제가 자주 고른 와인은 ‘1551’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와인인데요. 이름을 살펴보니 ‘코노수르 1551 샤도네이’라고 하네요. 적당히 시고 적당히 알싸한, 사실 바디감이 어째서 별 두 개인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가볍게 마시기 좋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1551 와인과 함께 레터를 쓰고 있습니다. 저의 오랜 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일주일에 와인 한 병 정도는 사 마실 수 있는 인생이라니, 그 정도면 꽤 괜찮은 거 아니야? 이십 대에 저와 그 친구는 동아리방에서 새우깡에 소주를 마시며, 우린 언제쯤 돈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 둘 다 이제 와 보니 그래도 와인 한 병은 사 마실 수 있네? 하며 깔깔거리고 웃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정도의 행복, 이 정도의 여유, 그 이상의 욕심은 사치라고 생각하며 웃었네요. 맞아요.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책 팔아서 와인 한 병은 사 마실 수 있다니, 3년 전과 비교하면 꽤 괜찮은데? 라는 생각을요. 더 비싼 와인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1551 와인이 제일 좋은 친구인 것 같아요. 당신도 어느 날, 와인을 사러 간다면, 1551이 쓰인 와인을 찾아 보세요. 느린서재를 생각하면서요.
이번 여름엔 저와 반려인, 양가의 부모님들이 좀 아프셨습니다. 여름 내내, 마음을 졸이고 있었어요. 멀리 광주와, 그나마 가까운 과천에 계신 부모님, 저희 엄마는 아주 오래 아프던 어깨를 수술하셨고, 시아버지는 종종 응급실에 실려 가셨습니다. 응급실에 실려가신 시아버지는 좀처럼 기운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세요. 연세가 90이 넘으셔서 병원에서도 뭘 해줄 수 없다, 라고 하는데… 마음이 매일 매일 조마조마합니다. 시어머니에게 전화라도 오면 혹시,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될까 많이 겁이 났습니다. 반려인은 이제 우리도 준비를 해야지, 라고 종종 말은 하지만, 그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게 뻔히 보입니다. 아니, 때로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 같아요. 원망하고 원망하지만, 그래도 그가 많이 슬퍼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마지막을 생각해 본 적이 여태 없으니까요.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 언제나 실패했던 아버지의 사업, 내 인생에 도움이 된 적이 없는 아버지, 늘 어두웠던 집안 분위기, 내가 갖지 못한, 내가 원한 아버지의 모습, 그런 것들을 그는 원망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원망이 시간을 거스르게 해주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원망을 내려놓고 그가 편안해지기를 바라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실 것만 같은데, 이제 부모님은 자주 아프고, 우리는 어쩌면 때때로 부모님을 돌봐드려야 하는 나이가 되었어요. 제 친구들 부모님도 아프시다는 이야기가 들려 옵니다. 십 대 시절부터 알던 친구, 이십 대부터 알던 친구, 우린 우리가 마냥 어린 줄 알았는데, 시간은 또 정직해서 이상하게도 어느새 나이가 들어버렸네요. 언제나 그 시절에 있을 줄 알았는데, 언제나 이십 대인 줄 알았는데, 월드컵은 2002년이 최고… 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꼰대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누군가 푸념하는 걸 들으면 그런 걸 가지고 뭐가 힘들다고, 나 때는 일주일 내내 12시까지 야근하고 그랬다고! 라는 생각이 불쑥 떠오르지만, 차마 말은 하지 않고, 꼭꼭 눌러둡니다. 꼰대라는 말은 듣기 싫어서 애써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사십 대는 일도 일이지만, 책임져야 하는 일도 많고, 돌봐야 할 사람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참으로 지금은 무거운 나이구나, 싶어요. 사십 대가 지나, 오십 대가 되면 부담감에서 좀 나아질까요. 아니, 더 무거워질까요. 어떤 시간이 올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어요. 시간은 정직하게 저를, 나이 들게 할 거고, 제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들이 또 일어날 거라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덜 놀라고, 지금보다 조금 더 담담한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가을이 되었으니, 선선한 바람이 엄마 아빠 아버지 어미니에게도 도착했음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그분들 삶이 가벼워지시기를, 그런 가을이 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