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주세요.
여름방학이 끝났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엄마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더운 여름에 아이들 밥 차리라, 집안일 하랴, 틈틈이 아이들과 놀러다니랴… 정말 모두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멀리서 이렇게...! 그 고생을 알아드릴게요. 요리를 잘 못하는 저는, 이번 여름, 점심 차리는 일이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밥… 점심을 챙겨주지 못하고 서울에 미팅을 나가야 하는 날들이 종종 있었는데 말이죠. 그런 날에는 서울로 출발하면서 꼬마김밥집으로 주문을 넣어두고 출발했습니다. 오전에 방과 후 수업 다녀온 아이는 배달된 김밥과 오뎅을 혼자서 챙겨 먹었지요. 이제 열 살, 사실 이런 시도는 이번에 처음 해보았습니다. 도시락을 싸두고 나가면 좋을 텐데, 그 누구보다 정신 없는 엄마라서 도시락도 싸주지 못하고, 배달로 점심을 대신했네요. 다행히도 김밥집이 맛이 있어서 큰아이는 어쩐지 엄마가 미팅 나가는 날을 은근 반기는 것 같았어요. 미안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한, 그런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어제가 큰아이의 개학식, 누구보다 개학을 기다린 건 저도 저지만, 딸이었습니다. 학교가 집보다 시원하다며, 어서 학교에 가고 싶어 했거든요. 아, 시원한 정도가 아니라 춥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긴 바지를 입고 가야 할 정도로 말이죠. 어딘가에서는 더워서 옷을 최대한 짧게 입는데, 학교에서는 추워서 긴바지를 입다니… 뭔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어컨을 좀 줄이면 안 되냐고 했더니, 그렇게 되면, 덥다고 난리치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죠. 춥다고 느끼는 저희 딸이, 긴바지를 입고 갔습니다.
이번 여름, 저는 에어컨 없는 일상을 실험(?) 해보았습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좀 위험한 실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렇게 시작된 것 끝까지 한 번 가보자, 라는 마음으로 에어컨 없는 여름을 보냈습니다. 옷을 최대한 가볍게 입고, 미리 얼려둔 아이스팩을 다리 밑에 넣고서, 혹은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서 일을 했지요. 잠을 잘 때도, 선풍기를 최고 풍량으로 올리고요. 아이스팩을 양 옆에 끼고 잤습니다. 얼마나 시원하게 잤는지 모릅니다. 아이들도 아이스팩 끼고 잔 올 여름의 하루하루를 아마 특별하게 기억할 것 같아요. 자기 전 의식처럼, 아이스팩을 꺼내, 겨드랑이에 단단히 끼우고, 오히려 너무 춥다며 곧 아이스팩을 옆으로 밀어둡니다. 12시 정도에는 제가 다시 시원한 아이스팩으로 갈아주고요. 에어컨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 무슨 유난이냐,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카메라로 지구를 구하는 방법>을 만들고 나서는 뭔가 오기가 생겼습니다. 죄책감도 생겼고요. 이런 책을 만들고 아무런 변화 없이 살던 대로 살 거라면, 책을 왜 만드냐, 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책은 5월에 출간되었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고, 어쩌다 보니 에어컨의 실외기가 있는 베란다 쪽이, 창문을 열어 두어도 엄청나게 뜨거워진다는 걸 발견했어요. 저런 상태로 하루종일 에어컨을 튼다면, 불이 안 나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하루 하루 에어컨 없이 사는 법을 연구하며 이번 여름을 보냈습니다. 생각보다, 할 만했습니다. 더구나 집이 더우니, 어디를 가도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동안 여름엔 에어컨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제가 너무 한심했습니다. 에어컨을 켜면 당장 이곳은 시원해지겠지만, 실외는 더 뜨거워집니다. 지구가 더 뜨거워진다고 말하는 건 입이 아프고요. 너무 더워 못 참는 날에는, 욕조엔 찬 물을 약간만 받고 옷을 훌러덩 벗고, 판판한 반신욕 깔대기(?)를 깐 뒤에 노트북을 올리고 일을 했습니다. 큰아이도 그 속에 들어와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었지요. 엄마는 일하고, 아이는 책 보고, 욕조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으면 지상 낙원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낸 여름을 저도 아이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너무 더워 숨이 막힐 것 같은 날에는 잠시 에어컨을 켰지만,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다시 끄고 말았습니다. 너무 더워 숨 넘어가는 날, 딱 한 시간의 에어컨, 이것이 저희 집 적정 시간입니다.
레터를 쓰고 있는 오늘 밤은, 바람이 꽤 부네요. 참 시원한 여름밤입니다. 하루 종일 돌아가는 선풍기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선풍기가 없었다면, 전 아마 만두처럼 쪄졌을 거예요.(갑자기 만두가 먹고 싶네요...) 지난 밤, 반려인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우리가 에어컨 없이 보낸 이번 여름 덕분에 지구 수명이 하루라도, 늘어났겠지?” 하루? 하루라니… 한 달은 늘어나지 않았을까, 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쩌면 하루가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번 여름, 전력난으로 정전이 되는 아파트가 엄청 많았다고 하니까요. 그냥 저는, 제가 에어컨을 안 틀어서 우리 아파트 전력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너무 더운 날에는 제가 강아지처럼 헉, 헉 거리고,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게 다 … 더위 때문인 것을요. 제습기도 에어컨도 틀지 않는 집, 바닥은 끈적끈적, 숨이 안 쉬어지는 집 안 공기, 따뜻한 거실 바닥, 무엇 하나 상쾌한 것이 없는 여름… 이러다 더워 죽겠다, 싶은 날에도 아이스팩을 껴안고 등목을 하며 버텨냈네요. 이런 게 바로 사서 고생이 아닐까 싶지만요. 아니다! 이런 게 바로 자업자득이죠. 그동안 지구를 망친 벌을 받는 거겠죠. 너무 짜증이 나는 날에는, 멘탈을 위해 에어컨을 켜, 라고 반려인이 말했지만, 혼자 집에서 일하면서 그럴 수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지난 주말 <느리게 산다>의 저자 선생님 댁에 다녀왔습니다.(선생님을 소개해준 친구 편집자와 함께요!😍) 왁스로 그림을 그리시는 이담 선생님의 그림들을 보고 아이들은 무척 신기해 했어요. 왁스를 녹여 색을 칠하고 조각을 하듯이 그 왁스를 벗겨내는 그림, 그렇게 산과 나무와 물이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왁스가 잘 녹으니 이 계절을 잘 이용해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에, 어떤 깊은 깨달음이 왔습니다. 계절을 타는 그림 도구들, 그때만 그릴 수 있는 그림… 그렇게 뭔가 그림까지도 자연의 시간을 따라 살고 계시는 선생님들의 생활은 무척이나 감동, 다시 봐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직접 담근 막걸리와 직접 발효를 해두신 빵 반죽에 올린 피자 토핑, 아이들은 고기가 올라가지 않은 피자를 무척이나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마 도시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열심히 뛰어놀고, 땀 흘리고, 선생님 집의 1층과 2층을 오르락 내리락 하고, 맛있게 저녁을 먹고, 그 흔한 유튜브 시청도 없이 아이들은 꿀잠을 잤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 집이 너무 시원하대요. 27도를 유지하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밤에는 어쩐지 서늘해서, 마련해 주신 선풍기까지 끄고 잤습니다. 이번 여름, 아마도 제일 시원하게 잠든 하루가 아닐까 싶어요. 심지어 이불까지 덮고 잤습니다.
<느리게 산다>는 느리게가 아니라, 부지런히 산다로 제목을 바꿔서 낼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들이 얼마나 먹거리에 신경을 쓰고 계신지 알고 있기에, 내어주시는 음식을 하나 하나 마음을 다해 먹었습니다. 이 음식들이 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그 시간과 땀과 정성을 생각하면서 말이죠. 무엇 하나 허투루 먹을 수 없어, 남김없이 하나하나 조심 조심 감사하게 먹었습니다. 남기면 또 쓰레기가 될 것이고, 그럼 또 죄 짓는 마음이 들고, 지구에 무엇 하나 보탬이 되지 않는 인간이라니… 라는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면, 인간이 싫어집니다. 뭔가 생각이 자꾸 극단적으로 흘러가는 이번 여름이었던 것 같아요. 자꾸만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을, 잡아봅니다. 인간도 싫고 플라스틱도 싫고, 에어컨도 싫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 하자,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고 후회없이 살자! 지구가 괜찮은 그날까지.
<카메라로 지구를 구하는 방법>을 만들어준 디자이너와 이번 여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진짜, 심각한 더위라고요. 그렇지만 우리, 좋은 책 재미있는 책, 만들다가, 지구가 버티는 그날까지 즐겁게 일하다가 가자고, 그런 이야기를 거의 매일 한 것 같아요. 뭔가 둘 다 기후위기를 진심으로 느낀 터라… 누가 보면 곧 갈 사람들의 카톡 같아요. 매일 기후 걱정을 하고, 지구를 걱정하고, 마지막 날을 정해놓은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라니…! 가끔은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매일 걱정한 기후위기 문제가 다 가짜였음 좋겠다! 이거 다 거짓말이면 좋겠다! 아, 진짜 엄마 왜 거짓말 했어? 얼마나 걱정했다고… 라고 우리 딸이 말하는 그런 날이 오기를…요. 누가 와서 좀 이야기해주면 좋겠어요. 기후, 생각보다 괜찮다고, 더워서 죽는 일은 없을 거라고, 우린 방법을 찾았다고… 그런 이야기를요… 제발요.
그런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서 내년 여름엔, 슬프지 않게 보낼 수 있음 좋겠어요.
다음 레터는, 아마도 시원해질 9월에 보내겠습니다. 정말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코로나가 기승이라고 합니다. 느린서재의 독자님들 모두 건강하게, 8월의 날들을 보내시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