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하지 않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수요일이에요. 국제도서전 첫날 일정을 마치고 맥주 한 잔 옆에 두고 레터를 쓰는 중입니다. 다리는 제 다리가 아닌 상태지만 왠지 마음은 가볍습니다. 사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거든요. 무엇이 걱정이었는지, 큰 행사를 앞둔 것이 걱정이었는지, 독자들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런지, 잠을 잘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날이 밝는 걸 지켜보았죠.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너무 부담이 되는 행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참가했던 행사들 보다 참가비도 너무 크고요. 책 세팅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도 많이 했어요. 그리고 제 부스 바로 근처에 느린서재 책값을 제때 주지 않았던 책방도 참가를 해서,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실 주최측에서 정해준 부스 배치도를 받고서, 너무 난감했습니다. 이제 거래를 하지 않기로 했던 ··· 책값 지불을 7개월이나 지나서 해줬던 그 책방이 제 자리 근처에 있는 게 너무나 신경이 쓰였거든요. 사실 저는 소심하고, 그 책방을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음 하는 마음이에요. 저를 도와주시는 이사님은, 그 책방이 잘못했는데 왜 너가 그 책방을 피하냐, 미안할 사람은 그쪽이다, 라고 했지만, 제 마음은 좀 불편했습니다. 그쪽은 느린서재를 신경 안 쓸지 모르지만, 책 3권 값을 받겠다고 그렇게 고난한 시간을 보낸 것이 떠올라, 서럽기도 하고 해서 ··· 그래서 한 달 전에 주최측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이러저러한 사연이 있어 자리를 좀 바꿀 수 없겠냐··· 는 메일을요. 당연히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요. 6개월 동안 준비해온 행사의 자리, 그 자리를 한 달 전에 바꿔달라 한다면 말이 안 되는 거니까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 메일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좀 어려울 것 같다, 그렇지만 혹시 다른 부스에서도 자리를 바꿔달라는 요청이 온다면 서로 맞바꿈을 할 수는 있겠다, 긍정적인 답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 는 메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작정 메일을 보낸 저, 그래도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 된다는 답변이 올 걸 알면서도, 메일을 보내는 것과 안 보내는 것은, 나중에 후회를 남길 것 같았거든요. 조금의 염려와 불편함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 책방 부스 자리와는 등을 대고 있어서 얼굴을 보지는 않을 거 같더라고요. 제가 이렇게나 소심해요. 어떤 날에는 알 게 뭐야, 이런 마음이지만, 어떤 날에는 한없이 작아지는 마음, 그런 마음이에요. 오늘을 지나고 보니, 그쪽 부스와는 서로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었어요. 제가 염려한 것보다는 마음 편히 내일도 도서전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올해 북페어에 나가서 느끼는 점이 있어요. 교보문고나 다른 책방에서는 주문이 잘 없지만, 북페어에선 잘 나가는 책이 있어요. 바로 <나를 키운 여자들>과 <문학처방전>입니다. 두 책 모두 이제는 구간이 되었어요. 출간한 지 한 달이 지난 책은 교보문고 매대에 다시 깔 수가 없거든요.(아, 돈을 내고 매대를 사면 깔 수 있죠!😂) 계속해서 신간이 들어오니까요. 그래서 독자들은 이미 구간인 이 두 책의 존재를 알 수가 없죠. 그렇지만 북페어에 나가서 인기 순위로 따지면 이 두 책이 인기가 제일 좋아요. 오늘 <나를 키운 여자들>은 총 7권을 가지고 가서 전부 다 팔고 왔어요. 영화에세이,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들만 모아져 있고, 그 여자들은 살짝 미쳐 있다, 이게 이 책의 핵심 카피입니다. 두 책이 팔리는 걸 보면서, 독자들은 어쩌면 정보를 접하지 못해서 책을 살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보문고에 가면 늘 보던 책들, 아님, 베스트셀러 위주의 책들만 접할 수 있는데, 북페어에서는 그동안 몰라서 사지 못했던 책들도 많이 만나게 되니까요. 그래서 독자들은 직접 입장권을 사서, 북페어에 오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쉽게도 <나를 키운 여자들>, 이 책은 현재 창고 재고가 0이에요. 얼른 중쇄를 찍어야겠습니다!
지난번 레터를 보내고 나서, 지인들에게 우려가 담긴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업계의 비밀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요. 그러나, 걱정해주신 것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느린서재의 뉴스레터는 아주 소수의 독자분들만 받아보고 계시기에, 그 사건의 당사자인 사람이 볼 일도 없고, 혹여나 그 당사자와 관계된 사람이 볼 일도 없거든요. 저는 그렇게 믿고, 메일을 보낸 거라서··· 염려가 될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다만, 그 책이 그 책이지? 라고 따로 물어오는 지인들이 많았습니다. 어차피 제가 지난 레터에 쓴 일은 이제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라서요. 그 인쇄소 그럴 줄 알았다는, 피드백도 많았어요. 혹시라도 그 뉴스레터로 인해, 저에게 안 좋은 일이 있음 어쩌나 하고 걱정하신 분들··· 이제 제 걱정은 마세요. 저 괜찮습니다!😅
오늘은 뉴스레터를 받아보고 계시다는 독자님을 도서전에서 만났어요. 그렇게 아는 척을 해주시니, 마음이 가득해졌습니다. 불특정 다수에서 한 사람의 얼굴을 알게 되는 것, 그건 아주 큰 힘이 있는 일이거든요. 일요일에는 뉴스레터를 통해 인연을 맺게 된 다른 출판사의 후배를 도서전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메일은 여러 번 주고받았고, 책을 만드는 일, 책을 파는 일에 대한 서로의 고민을 주고받은 상태지만, 저는 아직 그 후배의 얼굴을 모릅니다. 도서전에 나가 책을 파는 일도 좋지만,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그 만남 덕분에 하루하루 새로운 의미가 생기게 되네요.
도서전은 도서전이지만, 하나 또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도서전 때문에 동네 책방들은 때 아닌 피해를 입고 있어요. 도서전에 와서 책과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하시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사는 곳의 동네 책방을 잊지 않으셨음 좋겠어요. 그곳에서도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건 마찬가지의 마음이니까요. 책을 만나는 경험이, 1년에 한 번 있는 이 도서전 행사로 끝나지 않았음 해요. 좋은 책은 아마도 계속 나올 거고, 그 책들은 계속해서 독자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요.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다음 주에도 책이 필요하시다면, 동네 책방을 꼭 기억해주세요.
오랜 친구에게 오늘 카톡을 받았습니다. 큰 행사에 나갔으니, 부디 대표의 품위를 지키며 우아하게 행사를 잘 마무리하라고요. 경거망동하지 말고, 고요하고 차분하게 내일도 책을 팔겠습니다. 구걸하지 않는 마음으로, 초라하지 않은 마음으로, 느린서재 책을 소개해드리고 싶네요. 당당하게, 자신있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자와 함께 고르고 고른 문장들이 이 책 속에 있습니다. 어느 문장은 당신을 설레게 할 것이고, 어느 문장은 당신을 일어서게 할 겁니다. 그런 책을 당신에게 건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