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말 걸어주기를
그, 제가 좀 오지랖이 있어요. 놀이터에서 둘째 그네 밀어주다가 처음 만난 애기 엄마에게도 말 잘 걸어요. 사실 아기가 어릴 땐, 누가 말 좀 걸어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종종 했었어요. 어른하고 말 좀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땐 또 새로 이사 간 동네에 살고 있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요. 그때가 생각나서 그런가, 가끔은 아이랑 놀이터에 나와 있는 저보다 젊어 보이는 엄마들을 보면 말을 걸고 싶어요. 물론 이런 제가 좀 이상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건 잘 알지만, 저도 모르게 오지랖이 발동해서 종종 말을 겁니다. 정색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더 말 안 걸지만, 상대방도 반가워 할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럼 또 내심 아, 말 걸기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들고요.
한 번은 아침 등원 시간에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면서 둘째 그네를 밀어주는데 옆 그네에 또래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그네를 타더라고요. 아침 시간이라서, 그 아이도 유치원 버스 기다리나 보다, 하고 있었어요. 생각과 다르게 저도 모르게 그 엄마에게 말을 걸고 있었는데 아이가 네 살인데 아직 어린이집을 안 다닌다고 하는 거예요. 너무나 놀란 저는 “아니, 어째서, 왜, 어린이집을 안 가는 거예요?”로 시작하여 그 아이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집에 맛있는 것도 많고, 선생님도 친절하고, 재밌는 노래도 배우며, 가끔은 동물 친구들이 어린이집에 놀러 오기도 하며, 에어바운스도 탈 수 있고, 소풍도 가며··· 이 다섯 살 언니도 지금 얼마나 재미있게 유치원에 다니는 줄 아냐··· 어린이는 어린이집에 가야만 하는 거라며, 거의 속사포 랩을 쏟아냈습니다. 그렇게 하여 저는 그때 당시 저희 딸이 다니던 어린이집을 소개 및 홍보하기 시작했습니다.(저는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편이라, 중간 단계가 없어요.😅) 당연히 저는 그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과 아무런 커넥션도 없답니다. 그저, 어린이는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좀 오지랖을 부린 것이지요. 다행히도 아이 엄마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어 하던 차여서, 그렇게 하여 그 어린이집에 상담을 하러 가게 됩니다. 저도 모르게 진심으로 어린이집을 홍보한 셈이 되었어요. 어린이집보다 엄마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그 아이는 놀이터에서 저를 만나는 바람에 얼떨결에 그 다음 주부터 어린이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날의 오지랖은 좀 쓸모가 있었지만··· 저의 반려인은 이런 저의 오지랖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오지랖은 별로라면서, 저에게, 너나 잘하라는 말을 종종 해요. 왜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쓸데없이(?) 오지랖을 부리냐고 하는데··· 이게 안 하려고 해도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걸 어쩌겠어요.(하지만 연애할 때는 분명 이런 오지랖을 그도 좋아했던 거 같은데 말이죠.🤐)
과도한 오지랖은 문제지요. 말도 안 되는 참견이 되면 절대 안 되고요.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추천, 이거 정말 좋아, 이거 정말 재미있어, (이 책 정말 재밌어, 도 포함)싫음 말고 정도의 수준에서의 오지랖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 적당한 거리라는 게 늘 어렵지만 말이에요. 물론 괜히 오지랖 부렸다가 깊게 얽히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난감해지는 관계도 종종 있었어요.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괜히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상대방에게 괜시리 실망을 준 경험도 있었죠. 그런 경험들을 통해, 저도 최대한 절제(?)를 하고 있긴 하지만, 생각이 아무런 필터도 없이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지는 엔프피인 저는 그게 잘 안 되긴 해요.
하지만 책 만드는 편집자에게 오지랖은 꽤 많은 도움이 됩니다. 아니 오지랖이 없음 일하기 좀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저자를 섭외할 때는 늘, 초면인 저자에게 섭외 메일을 보내야 하고, 어느 정도 팬심을 담아서 구구절절 섭외하려는 이유를 써야만 하거든요.(약간의 뻥을 좀 담아서 말이죠.) 게다가 저자가 원고를 쓰다가 막힐 때면,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자주 제가 던져야 하기도 하고요. 도움이 될 만한 책도 자주 추천드려야 하고요. 디자이너랑 일을 할 때도, 한 번에 팍- 하고 멋진 표지가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럴 때도 주저하지 않고 오지랖을 좀 부려 봅니다. 제목을 키우는 건 어떤지, 새로 나온 이 폰트로 바꾸는 건 어떤지, 색깔은 a b c 로도 변형해 보면 어떤지···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나누고 이리 저리 배치를 바꾸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원했던 목적지에 도달해 있기도 하더라고요. 아무튼 책 만드는 저는 사방팔방 이곳저곳에 관심도 많고 오지랖을 자주 부리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제게 가만히 좀 있으라고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런 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엊그제는 메일 한 통을 받았어요. 다른 출판사의 디자이너였는데 <월급쟁이 이피디의 사생활>커버 종이와 띠지 종이가 독특한데 어떤 종이인지 알고 싶다는 내용이었어요. 당연히, 이런 메일을 받으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나눠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막 방방 뛰게 하더라고요. 표지 종이는 팬시 크라프트 110g, 띠지 종이는 팬시 크라프트 90g인데, 거친 면으로 인쇄해달라고 인쇄소에 이야기해야 한다고 회신을 했습니다. 혹시라도 이 레터를 읽고 계신 분들 중에도 그 책의 종이가 무엇인지 궁금할 수가 있을 테니, 혹시 몰라 여기에 정보를 남겨 둡니다. 누군가는 그런 정보를 막 알려주면 너의 경쟁력이 사라지지 않겠냐며··· 정보를 공유하지 말라고도 하더라고요. 특히나 좀 어렵게 알게 된 정보들이나, 마케팅 비법 같은 거에 대해서 말이죠. 누군가는 돈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정당한 대가를 받고 정보를 주고받는 시대가 바로 지금의 사회라고 하면서 말이죠. 근데 생각해 보면 저도 다 누군가에게, 좋은 마음으로 공짜로 알게 된 정보들이에요. 바보 같은 일일 수도 있지만, 저 역시 선배들에게, 사수들에게 알음알음 배우게 된 정보들이라, 저 역시 그렇게 알려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제가 돈을 받고 정보를 팔면, 저는 아마 뛰어난 장사꾼이 되겠죠. 지금처럼 적자를 내지도 않을 거고요. 사실 이런 마음도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너무 힘들 때, 누군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적금 드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돕기도 합니다. 이렇게 내가 보낸 마음들이 돌아와 언젠가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하고요. 너무 순수한 생각인가요? 이런 말 옛날 어른들이 하던 말인데··· 어느 순간 이 말을 믿게 되었어요. 에잇 뭐 안 돌아오면 어때요. 할 수 없는 거죠. 사실 그렇게 날린 돈과 시간, 인간관계도 많아요.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타고난 게 이런걸.
1인 출판사를 하면서 어려웠던 순간들이 꽤 있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막 울면서 편집했던 날도 있었고요. 저자 분에게 드릴 계약금 중 단돈 10만 원이 모자라 돈을 부치지 못한 날도 있었는데요.🙄 제가 먼저 누군가에게 도와 달라 말하기는 너무 자존심 상하고, 그때마다 먼저 경험한 선배나 동료가 손을 좀 내밀어 줬으면 하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저에게 오지랖 부려줄 누군가를 기다렸던 거 같아요. 도와 달라고 말하면, 왠지 루저가 되는 것 같아서, 그리고 상대방도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라는 생각에 괜찮은 척했던 날이 많았어요. 그런 마음이 들어서 이제는 제가 먼저 물어보고 다닙니다. 혹시 이런 거 필요하지 않냐고, 나에게 이런 기술이 있으니 나를 이용하라고, 이런 사람을 연결해줄 수 있고 이런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언제든 연락하라고요. 이렇게 동네방네 말하고 다녀도 사실 잘 연락이 안 오더라고요. 민폐가 될까 봐··· 부담이 될까 봐, 귀찮게 할까 봐, 혼자 알아서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어요.(아님, 제가 좀 이상해 보였을까요?😅)
너무 뻔한 말이긴 한데, 뭐든 나눠서 들면 좀 낫지 않을까요. 돈으로 치환되는 관계가 아닌, 그렇지 않은 관계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느슨하고 가느다란 연대가 아닐까, 하고요. 책을 만드는 분이든, 아이디어가 필요한 분이든, 언제고 무엇이든 서로 서로 물어볼 수 있는 사이가 되면 좋겠어요. 그렇게 제가 필요한 곳에서 저의 쓰임이 있음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만간, 출판 노동자들과 만나는 오프라인 모임 같은 것도 한 번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신입 편집자도 좋고, 출판사 취업을 준비하는 후배, 10년 차 편집자, 마케터, 프리랜서 디자이너까지··· 모두 모두 모여 서로의 고충을 소소하게 이야기해보고, 해결책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저런 해결 방안을 모색해보는 그런 시간··· 그런 자그마한 모임을 한 번 꿈꾸어 봅니다.(혹시라도, 이 메일을 읽는 분 중, 그런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메일 보내주세요!)
아, 진짜 또 편지가 길어지고 말았네요. 내일부터 연휴 시작입니다. 동탄에 있는 <바다숲책방>이 다음 주에 문을 닫아요. 레터를 읽는 분들 중 근처에 계신 분들이 있다면 한 번 들려보셔도 좋을 거 같아요. 저는 어제 가서 한아름 책을 사서 돌아왔습니다. 귀한 책들이 아마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5월 말에는 <바다숲책방> 책방지기님의 ‘폐업일지’를 레터에 싣기로 했어요. 책방의 탄생과 안녕에 대한 이야기,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