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회
3월에는 종종 비가 내렸고 종종 바람이 불어서 저도 종종 얇은 패딩을 입고 나갔습니다. 바람이 부는 건 딱 질색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는 서해 바다 앞인데 바람이 꽤 많이 붑니다. 서쪽이라서 그런지 황사도 참 많이 오고요. 그래서 저는 바람이 불지 않는 동네로 이사가고 싶다고 종종 생각합니다. 이사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에요. 겨울에도 바람이 불지 않는 고요한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게 올해 저의 소망인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바람이 불면 실제보다 더 추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3월에는 자주 춥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제 오늘 급격하게 따뜻해진 공기를 느낍니다. 오늘은 둘째가 엄마 벌써 4월이야, 시간이 참 빠르지, 라고 말했는데요. 여섯 살에게도 시간이 빠르다는 게 느껴지는 구나, 싶은 생각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정말 시간이 빠른 것 같다고 저도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제주에 다녀왔습니다. 제주 북페어에서 책을 팔러 참석했습니다. 혼자 가야 하는 일이 설레면서도 좀 두렵기도 해서, 가기 전까지 마음이 싱숭생숭했습니다. 저 혼자 북페어에 참석하면 행사 내내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할 텐데,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행사 당일에는 책 파느라 잘 모르겠지만, 낯선 환경에서 우물쭈물할 저의 모습이 그려졌거든요. 혼자서 밥도 잘 먹고 혼자서 영화도 잘 보는 저지만, 200팀이 참여하는 그곳에 덜렁 혼자 있을 저를 상상하는 일은 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물론, 제주에 친구가 살고 있어서 아는 사람이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에요. 그러다가, 제주에 가기 전 문득, 혜윰터 출판사 대표님에게, 제가 제주에 가서 북페어를 도와줄 독자님-알바를 구할까 봐요, 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무래도 느린서재 책을 아는 독자분과 제주에서 함께 책을 판다면, 또 어떤 시너지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혜윰터 대표님은 살짝 고민을 하시더니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부스를 쉐어하는 거죠. 같이 책도 팔고 제주도 구경하고…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겠습니까. 저에게는 너무 좋은 제안이지만, 괜히 제주에 오시느라 대표님 일할 시간을 뺏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어쩐시 신나 하시는 대표님의 얼굴을 보면서 저도 살짝 안심이 되었습니다. 물론 비행기 시간은 달라서 각자가 끊은 티켓에 맞게 일정을 정하기로 했고요. 따로 또 같이 제주에 도착해서 제주북페어에 참가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결과는 아주 굿, 부스를 쉐어했고 서로 자리를 비울 때는 서로의 책을 더 열성적으로 팔면서… 그렇게 완판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제주북페어 이야기는 인스타에서도 종종 했고… 오늘은 제주에서 만난 독특한 책방 이야기를 전할까 합니다. 인스타로 인연을 맺은 선우책방이라는 곳인데요. 이곳은 책방이지만 책을 팔지 않는다고 했어요. 책방인데 책을 팔지 않고 독서 모임을 진행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언제가 인스타에 제가 올린, 트렁크에 가득한 책 사진을 보시고는 선우책방의 책방지기님이 제게 디엠을 주셨어요. 제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고요. 그래서 제주에 오면 꼭 보자고 하셨지요. 선우책방이 궁금하던 차에, 이번 북페어를 핑계삼아 인사를 드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팔지 않는 선우책방은 어떤 곳일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제주에 가는 첫날 저녁에 선우책방에 들리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제주시 노형동, 그곳은 서울의 강남과 같은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제주지만 차가 가장 많이 막히는 곳이라고도 하고요. 막히는 길을 뚫고 도착한 어느 오피스텔 2층, 저는 잠깐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면식도 없고 온라인상에서 만난 이 선우책방, 정체도 모르면서 여자 둘이 들어가도 되는 걸까, 하는 고민이 들더라고요. 하여튼 제가 좀 <그것이 알고 싶다>를 많이 봤거든요.😅 그러나, 순간 저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순수하고도 이상한 열정을 믿었습니다. 누가 보면 좀 바보 같다고 할 수도 있는 이상한 믿음이긴 하지만요. 제주시 노형동의 어느 오피스텔 2층 선우책방에 들어가자, 오피스텔 가득… 책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책방지기 두 분이 저와 혜윰터 대표님을 맞아주셨고요. 아… 내가 방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인상 좋으신 두 분이, 저희를 맞이해 주셨고, 저희들은 내내 책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의 … 5천 권? 아니 9천 권이 넘는 책이 가득한 이 공유서재에서 두 분은 책을 읽으시고 일요일 아침마다 또 다른 멤버분들과 독서모임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꽤 책이 많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많은 책을 한 사람이 소장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물론 일본의 어느 작가는 7층 짜리 건물 전체가 온통 개인이 사서 모은 책으로 도배되어 있다고도 하지만요. 더 이상 집을 책에 둘 수 없어서 오피스텔 하나를 빌려 공유서재처럼 이용하고 계신 이곳의 책방지기님… 책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을 이 레터에 제가 표현할 길이 없네요. 저와 혜윰터 대표님은 각각 책 한 권씩을 증정해드렸고 저희는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그리고 … 어마어마한 회 코스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고작 책 한 권을 드리고, 회로 보답을 받았네요. 끝도 없이 나오는 회와 튀김, 옥돔, 고등어 회, 찌개… 사실 그렇게 거대한 저녁을 기대하고 간 건 아니었는데… 책 한 권 값으로는 너무 과한 저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거기서도 저녁값을 책값으로 환산하고 있었습니다. 음, 오늘 저녁은 책을 도대체 몇 권을 팔아야 하는 걸까… 제주에서, 서울에서 온 두 사람에게, 출판사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그냥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갑자기 무한 신뢰와 환대를 줄 수 있는 걸까요. 인류애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요즘인데 말이에요. 이렇게 무턱대고 나는 누군가에게 내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며 환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참으로 이상한 밤이었습니다.
선우책방 책방지기님의 본업은 부동산 중개업입니다. 제주에서 부동산을 하신대요. 책을 사기 위해서 공인중개사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다음에 제주에 가게 되면 좋은 숙소도 제공해주시겠다고, 언제든 오라고만 하시네요. 책을 만든다는 이유로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걸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인연이 가능하다는 게 마치 비현실적이더라고요.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서 참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하루였습니다. 이건 사실, 책방에 들릴 때도 마찬가지예요.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서, 책방에 가면 공짜 커피도 얻어 마시고요. 그리고 굿즈 같은 것도 선물로 주실 때가 있어요. 책을 소개하러 왔다고 하면 내치지 않고 제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시고요. 만약 제가 책이 아닌 다른 상품을 팔러 갔다면, 잡상인 취급을 받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 책을 만들기 참 잘했다… 는 생각이 듭니다. 반도체를 만드는 것보다 큰 돈은 못 벌 수 있겠지만, 나라 경제에도 기여를 못할 수도 있겠지만요. 그렇지만 순수하고 이상하고 착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저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제가 과대포장되는 느낌이랄까요. 제가 가진 능력보다 더… 좋게 포장되는 것 같아서 민망하기도 하네요.
지난번 레터를 보내고 나서, 출판계의 후배님에게 회신을 받았어요. 왠지 같은 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다정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요. 저 역시 그 후배님이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한없이 친절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아마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그런 마음이겠죠. (물론 지난번 레터의 그 책방은 빼고요. 저 살짝 뒤끝이 있어요.😂) 이 레터를 누가 읽을까, 싶다가도 이렇게 '제가 읽고 있어요', 라는 인기척이 느껴지면 아, 그래도, 레터를 쓰길 잘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온통 제 지인들만 이 레터를 읽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레터의 존재를 알게 되고 제가 모르는 누군가가 이 레터를 읽고 힘을 내고, 또 때로는 기대기도 한다는 사실에 저 역시 힘이 납니다. 힘이 나서 2주 뒤에도 또 레터를 쓰게 되고요. 레터를 쓰기 전에는 무슨 이야기를 쓸까 하다가도, 어느새 주저리 주저리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저를 보고 있자면, 아니 뭐 이렇게 할 말이 많은 거야… 레터 시작 안 했으면 어쩔… 아까는 쓸 말 없다면서 끝을 내지 못하는 저를 보면 참… 웃긴 녀석이군, 하는 마음이 듭니다. 혹시라도 당신이 출판업에 종사하고 있으시다면 가끔 회신 보내주세요. 지금 일하는 곳에서 부당한 일을 겪을 수도 있고, 혹은 출판계의 선배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요. (제가 그랬거든요. 회사 선배 말고, 다른 곳에서 일하는 동료나 선배의 이야기가 그리웠거든요.) 제가 뭐 그다지 큰 힘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 서로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어떤 미로 속을, 빠져 나가는 길을 같이 모색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이름 모를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거니까요.
아이고, 오늘도 참 말이 길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느린서재 편집자입니다. 2주 후에 또 알차게 돌아올게요. 쇼츠가 유행하는 시대에 이렇게도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투표하고 만나요!
아래는 <선우책방>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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