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미래
1월의 마지막 레터네요. 지난주에는 신간도 나오고, 모임도 있어 바쁜 한 주를 보내고··· 여유롭지는 않지만, 일단 차분한 마음으로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제 옆자리에는 방학이라 학교를 가지 않는 첫째가 엄청난 미술 활동을 진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택배 박스를 잘라서 인형 집(심지어 이층)을 만들고, 더불어 거기에 분홍색 물감을 칠해주고 있네요. 그래도 혼자서 잘 놀고 있으니 책상이 어질러지는 건 좀 감수해야겠죠? 오전에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 언니를 보며(오후에 영어 학원을 가는데 말이죠···) 둘째까지 덩달아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 선언을 하여 아침에 얼마나 식겁했는지 모릅니다. 한라봉 주스로 꼬시고 달래고, 오늘은 엄마가 차로 데려다주겠다, 공주 원피스 입자, 유치원 하원 하고 언니가 만든 인형 집으로 놀자··· 등등 온갖 애교를 부려서, 비위를 간신히 맞춰서 둘째를 데려다 드리고 왔습니다. 차에서 “아까 왜 유치원 안 간다고 했어?”라고 물어보니, “언니가 안 가니까, 나도 가기 싫어···.😑”라고 말하더라고요.(엄마도 사실은 아무 생각 없이, 너랑 놀고 싶어···) 유치원 방학은 벌써 끝났는데, 언니는 왜 아직 방학이 한 달이나 남은 걸까요. 오전에 가는 방과 후 수업이 없는 금요일마다 둘째의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래도 심기 경호를 잘하여 유치원에 보내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야 저도 일할 시간을 확보할 테니까요.
일하는 엄마들이라면 모두 공감하겠지만, 방학엔 참으로 난감한 일들이 펼쳐집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더구나 재택근무가 아니라면 출근을 해야 하는데, 할머니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사교육에 온전히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죠. 그래서 방학마다 온갖 캠프가 열립니다. 외국으로 보내는 한 달 짜리 캠프부터, 제주도에서 진행하는 영어 캠프까지···. 저도 하루하루 일할 시간을 충분히 챙기지 못해서 (아침, 점심, 저녁 차리다 보니, 일할 시간이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내년에는 캠프를 알아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또 한 달씩 보내려니 아이가 잘 적응할까 걱정도 되고, 돈 걱정도 되고,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냐··· 라고 걱정도 되고,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무네요. 혹시 저와 같은 고민을 하시는 분, 혹시 한 달짜리 캠프에 아이를 보내 보셨던 엄마 선배들의 경험을 듣고 싶습니다. (메일 보내주세요.😅)
지난주에 나온 신간은 <문학처방전>입니다. 인쇄하기 전에 제목을 여러 가지로 다시 고민해보기도 했는데, 역시 문학처방전보다 더 정확하고 확실한 제목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자는 아픔을 의뢰한 스무 명의 환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아픔이 시작된 시점부터, 아픔을 유발한 사람은 누구인지, 그 아픔으로 인해 겪고 있는 불편, 혹은 불안감··· 의뢰자의 아픔의 서사가 꼼꼼하게 그러나 다정하게 펼쳐집니다. 그 아픔의 서사를 이야기하는 의뢰자들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다시 한 번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요. 일리치 약국에서 일하시는, 문학 전공자인 박연옥 작가님은 그들의 아픔에 꼭 맞는 소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이다가, 이 소설이 왜 당신에게 필요한지 다정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소설 속 주인공의 태도를 배울 수도 있고, 소설 속 이별과 상실을 마주하며 나의 상황에 투영해보기도 하죠. 저는 꽤 많은 챕터에서 공감했어요. 알코올 의존증에도, 우울증에도, 불면증에도···😂 여러분은 어떤 질병을 앓고 계신가요? 몸의 통증, 마음의 통증, 어느 것도 괜찮습니다. 스무 개의 이야기 중 당신의 아픔에 해당하는 내용이 하나는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저는, 다시 새로운 원고를 편집 중입니다. 원고 내용은 ··· 한줄로 표현해 보자면 한국의 니어링 부부의 삶이라고 해야 할까요. 소비는 거의 없고,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고, 원래 있는 물건들은 필요에 따라 해체하여 다시 만들고··· 옷도 다 직접 만들어 입으시고, 먹는 것도 거의 다 손수 기르시고, 집에서 빵까지 다 만드시는···! 그야말로 소비의 시대에 역행하는 삶을 사시는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두 분을 만나게 된 건 어쩌면 우연, 아니 인연일지도 모르겠어요. 선생님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갔었는데, 꼭 필요한 물건들만 제자리에 있는 정갈한 집의 모습에 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점심때가 되어 직접 반죽해서 만든 도우에, 직접 기른 재료들을 토핑으로 올려 피자를 만들어주셨어요.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피자였는데, 재료들의 어울림이 소박하면서도 자신의 색깔을 정확히 내고 있었죠. 하나하나 맛을 음미하면서 먹다 보니 제가 제일 많이 먹었지 뭐예요. 게다가 직접 만드신 술까지 한 잔 내어주시고··· 이렇게 먹으며 산다면 건강해지지 않을 수 없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은 피자를 싸주셔서 풍성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던 게 생각이 납니다.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도 피자를 권했지만, 기름기가 넘치는, 고기도 듬뿍 들어있는 피자에 익숙한 아이들은 이 담백하고 정갈한 피자를 거부하더라고요. 버섯과 채소들의 맛을 음미하기엔 아이들이 아직 어린 거겠죠. 선생님이 주신 원고도 정갈하고 담백하고 소박하고 기름기가 없는 원고였어요. 화학물질은 전혀 없는, 화장을 하지 않은 민낯 그대로의 얼굴이랄까요. 깨끗한 얼굴을 마주대하듯 원고를 읽어 내려가며, 저 역시 조심스럽게 원고를 만지고 최소한의 수정만 보탰습니다. 제가 받은 이 감동을, 그리고 최소한의 소비만 있는 이 정갈한 일상을, 어서 독자분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2월 내내 열심히 만들게요. 기다려주실 거죠?
이 원고는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되었어요. 오랜 친구이자, 편집자인 그의 전화, 너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며, 분명 너도 좋아할 원고라는 그 말에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지금 당장 원고의 내용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저자분들의 삶을 더 동경하는 거겠죠. 혹시 또 모르죠. 몇 년 지나, 저도 어느 시골집에서 책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작은 집에서 담백한 채소들을 기르면서, 그걸로 밥해먹고, 또 책을 만들고, 또 그 집에서 북토크도 하고, 곧 그런 날이 곧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첫째 점심을 차려주고 설거지는 뒤로 미뤄둔 채 돌아와 다시 레터를 마무리합니다. 방학 동안의 하루는 아무리 촘촘하게 계획을 세워 운영한다고 해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네요. 이제 곧 사춘기가 시작될락 말락한 아이의 심기를 잘 맞추면서 오늘 하루도 잘 마칠 수 있음 좋겠어요. 책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아이와의 이 방학도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니··· 언젠가 저도 아이도 자신만의 인생을 사느라, 서로의 인생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는 날이 오겠죠? 아직은 너무나 멀리 있는 시간처럼 느껴지지만요.
방학이 아직 한 달 남았습니다. 모두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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