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마지막 금요일
오늘, 23년의 마지막 금요일이네요. 날짜를 맞춘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저는 23년의 굿바이 레터를 쓰고 있습니다. 사실 마지막 날이라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어요. 어차피 내일도 일하고 모레도 또 일하고 그럴 건데··· 그래도 마지막 금요일이라니 뭔가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네요.
오늘 저는 2년 동안 이용했던 물류 창고와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느린서재의 첫 물류 창고였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계약을 했습니다. 기존에 이용하던 곳은 다른 창고들보다 단가가 좀 높지만 책을 깨끗하게 관리해준다고 소문이 난 곳이었는데요. 재고가 계속 늘어나니까 관리 비용이 쭉쭉 올라가 더 감당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12월을 마지막으로 안녕을 고했습니다. 그동안 느린서재 책을 관리해주신 분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내년에 더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보내주신 답문자에 울컥했습니다. 창고를 이전할 때, 책 못 보낸다고 실랑이를 벌이는, 재고도 엉망으로 기록해서 주고 책도 상하게 만든다는, 약간 구질구질한 창고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제가 이용했던 창고는 저를 쿨하게 보내주셨습니다. 오히려 저의 앞날을 응원해주시는 문자에··· 감동을 받았지요. 왠지··· 2년 동안 사귄 연인과 헤어지는 느낌이라면 좀 오버일까요? 매일 아침마다 물류 창고 프로그램에 접속해서 책을 발주하는 일을 했는데, 이제 그 프로그램과도 안녕이라는 생각을 하니, 전 남친과 헤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앞으로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라면, 계속 같이 갈 수는 없겠죠. 현실적인 고민 속에 저에게 맞는 창고와 새 계약을 했습니다. 매달 창고비가 권수대로 나오기 때문에, 사실 이건 월세를 내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신중하게 계약을 했습니다.
이전하는 창고에서는 ··· 책들이 쌓여 있기보다 훨훨 날아가기를 바라봅니다. 창고가 텅텅 비는 상상을 하며 오늘의 아쉬움을 달래 보려고요.
24년에는 기존 거래하던 인쇄소도 옮기려고 해요. 조금이라도 단가가 낮은 곳으로··· 지급일도 조금 느슨한 인쇄소를 소개 받았거든요. 그야말로 ‘느린서재 허리 졸라매기 프로젝트’라고 할까요. (오늘도 짠내 레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고정비를 줄이고 24년에는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모든 걸 다 줄이기로 했습니다. 이대로는 버틸 수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거든요. 그래서 24년은 어쩐지··· 다시 새출발 하는 기분이에요. 느린서재 제2막이라고 할까요?
반려인이 물어보더라고요. 저의 24년 목표를요. “음··· 목표는 버티기야.” 당연한 걸 물어봐서 좀 당황했어요. 24년의 슬로건은 “버티기”입니다. 버티지 않으면 25년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허리띠를 졸라매고 줄이고 줄여서 무조건 버텨 볼라고요. 24년의 버티기에 따라, 느린서재의 생사가 결정된다고 해야 할까요···. 요즘 매일 디자이너랑 존버, 존버 하며 카톡을 주고받습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티자고요. 야간 알바라도 하면서 버텨보자고요.(실제로 디자이너는 거의 새벽 서너 시까지 일을 하고 있어요. 외주 작업이 많아서요.😆) 책들이 꾸준히 나갈 수 있게 ··· 지하철에 자리라도 깔고 앉아 홍보를 해보자는 말까지 나왔네요.
최근에 저는, 다른 일자리 제안을 받기도 했습니다. 출판은 가능성이 없으니 그만 접으라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그런데 아직 미련이 남았어요.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거든요. 아니, 끝낼 수 없죠. 끝내더라도 재고는 다 없애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왜, 있잖아요. 눈물의 재고떨이··· 아, 아 지금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새로운 일을 제안하신 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로운 일도 주시면 알바로 할 테니, 일단 주시면 다 하겠다고요. 그렇게 해서 이런저런 고정비 내고 생활비도 대고 하면 내년에는 좀 여유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 몇 달 동안 인쇄소 대금 때문에 너무 압박이 심했어요. 인쇄 대금이 밀리는 바람에 엄청나게 독촉을 받았거든요. 회사 다닐 때는 모르던 기분···. 집에 있는 금을 팔아서 일단 일부라도 만들어 보내드렸지요. 금을 현금으로 바꿔주신 사장님께서 제게 내년에는 잘될 거라고, 경기가 좀 나아질 거라고, 덕담을 해주셨어요. 모르는 분도 이렇게 응원을 해주시니··· 분명 내년에는 잘되어야만 한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안 되는 거면, 그만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요. 그게 손실을 줄이는 일 아니냐고요. 맞아요. 팩트만 보면 그런데, 이게 팩트로만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요. 분명히 돈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있거든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라는 뻔한 그 말에 담긴 진리를 이제 조금 알 거 같거든요. 물론 돈으로 되는 일은 많을 거예요. 정말 많은데···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근데 돈으로만 설명 안 되는 것이 있거든요. 돈이 아니어도 되는 일들이 있더라고요. 돈이 아닌 다른 것들로도 해결되는 일들, 말 한마디로 해결되는 일들, 마음으로 사람 울리는 일들··· 돈이 아니어도 저를 버티게 해주는 것들···. 물론 돈도 중요해요. 당연히 중요하니까, 고정비를 줄이겠다고 이 난리를 치는 거지요. 그래서 그 균형을 맞추는 일을 24년에는 해보려고 합니다.
최근 두 달 동안, 전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 버는 일이란, 과연 언제 끝나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일 매일 차리는 밥이 지겨울 때, 가끔 외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돈 버는 일도 그렇게 잠시 쉬어도 누군가 해주는 일이 된다면 좋을 텐데··· 이건 그럴 수가 없네요. 돈 버는 게 지긋지긋하다 생각하면서도, 돈이 들어오면 또 감사하고,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노예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다고 해도 아이들이 있는 한, 책임이 있는 한, 아이들 배는 골리지 말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저는 책을 만들고 책을 팝니다.
2년 동안, 느린서재 책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횡설수설하는 레터도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가열차게 한 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가열차게 그리고 잘 버티면서 책을 만들고 또 팔아볼게요. 24년에도 계속 레터는 이어집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남았거든요. 아, 이제 레터 지겨워, 라고 할 때까지 계속 보내보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당신, 올해보다 내년에 더 좋은 소식이 많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