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자연인
비가 하루종일 오네요. 어쩐 일인지 오늘은 일하기 싫은 날이에요. 비도 오고 그래서, 그런 걸까요. 12월을 너무 열심히 달려서 그런 걸까요.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아서 일까요? 뭐가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런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사실 경쟁하는 일에 지친 걸지도 모르겠어요. 매일 저도 모르게 다른 책들과 우리 책들을 비교하고 스스로를 경쟁에 몰아 붙이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매일 매일 그런 압박에 나를 너무 노출시킨 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책을 만들고 있으니 경쟁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요. 그렇지만 피곤한 건 사실이에요. 저도 모르게 제가 만든 책의 순위를 날마다
체크하고 있으니,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오늘도 들여다 보지 말아야지 하다가, 나 자신도 모르게 클릭, 클릭 하고 있는 저를 발견… 아무래도 인터넷 선을 끊어야 할까 봅니다.
우리는 과도한 연결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은 것도 분명히 있고, 누군가는 그걸로 돈을 벌기도 하지만 말이죠. 그렇지만 각자의 인생은 어쩌면 옛날보다 예민해지고 과장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혼자만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뭔가 불안하고, 그렇다고 계속해서 인터넷에 연결되어 다른 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누가누가 어떤 책을 읽는지 관찰하고 요즘 트렌드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분명 우리는 너무 바쁘고 복잡한 지금의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은 편지를 보낸 뒤, 인터넷에 접속하지 말아볼까 합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저도 저를 모르겠지만요.
지난주에 문득, 반려인이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1인 출판사를 하고 난 뒤, 뭐가 제일 좋으냐고 물었어요. 그리고 그는 제게 활기가 넘쳐 보여서 좋다는 말도 했지요. 분명 활기가 넘치기도 해요. 그렇지만 거래처 지급일이 다가오면 심장이 너무나 두근거리기도 합니다. 결제해야 할 금액은 정해져 있고, 서점에서 입금한 내역은 그렇지 못한데, 과연 그 갭을 어떻게 메우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활기차 보이는 건, 어쩌면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1인 출판사를 하기 전에는 가끔, 종종 나는 무슨 쓸모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주부지만, 살림을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저, 살림에는 영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살림을 하면서 엄청난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림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저는 사실 살림이라는 게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살림을 좋아하진 않았어요. 집이 깨끗해지고 정리되어 있는 걸 보는 건, 너무나 즐거운 일이지만, 그걸 하는 과정은 손에 착착 익지도 않고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지도 못하고… 아 나는 정말 언제쯤 살림을 잘하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죠. SNS를 보며, 살림을 잘하는 고수들을 보며, 나도 살림 고수가 되어 보겠어, 하고 의욕을 불태우다가도 막상 하다 보면, 으! 매일 돌아가는 살림 루틴, 정말 지긋지긋 해! 라고 소리쳤죠. (정말이지, 살림을 40년도 넘게 하고 있는 엄마가 존경스러웠어요. 흑흑)
그렇다고 제가 프리랜서로서 엄청 잘 나가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느린서재가 엄청 잘 된다, 이건 또 아니지만 말이에요😅) 스스로 여기저기 영업을 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닌데다가, 제가 원고를 선택할 수도 없는 처지라서 하기 싫은 원고가 들어와도 무조건 해야만 했죠. 게다가 어떤 일은, 일을 하고도 제대로 돈을 받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기도 했고요. 자율성이라는 건 하나도 배려되지 않는 프리랜서의 삶 또한 고단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어떤 날은,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든다며 의뢰인에게 엄청나게 혼이 나고, 욕을 듣기도 했었죠. 이땐 정말, 난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인가, 하는 생각에 무척 괴로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아까 그 질문을 돌아와서, 출판사를 하고 난 뒤 뭐가 가장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당연히, 경제적 자유는 아직 이루지 못했고요. 그렇다고 회사 다닐 때보다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온전한 자율성과 온전한 자유를 얻었다고 해야 할까요? 또한 온전한 책임도 더불어 얻었습니다. 또 가장 좋은 건,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과 저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독자 그리고 저자를 만났다는 것… 그래서 아, 나도 이런 쓸모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 그게 가장 좋은 점이 아닐까 싶어요.
조금 더 자신을 들여다보니, 저는 인정받고 싶었던 거 같아요. 잘한다는 말,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어쩌면 살림에 매달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열정적으로 책을 읽어줬던 것 같기도 해요. 뭐든, 잘하는 거 하나는 있겠지, 하면서 아내와 엄마 역할에 매달렸는데 하다 보니 잘하지도 못하고, 시간이 갈수록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거든요. 이놈의 인정욕구… 결국 그것 때문에 그동안 나의 쓸모를 여기저기서 확인하고 싶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책을 만드는 것도 그, 연장에 있는 일 같기도 합니다.
인정욕구를 넘어서, 경제적 자유를 넘어서 진짜 자유를 찾아보고 싶어요. 그 누구의 인정이나 평가가 아닌, 내가 나를 스스로 좋아해주는 그런 제가 되기를 바라는 중이에요. 저 자신이 스스로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짜 자유로워지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해보는 오늘입니다.
이 편지를 읽는 당신은 오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오늘은 자연인이 되고 싶어요. 아무런 욕망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인이 되고 싶네요. 이 편지를 읽는 잠깐이라도 당신의 호흡이 아주 편안하기를.
2주 뒤에, 또 편지 보낼게요. 한 해를 잘 마무리하시고, 행복하시고, 또
아름다운 책과 함께 하시기를.